━ 미국발 세계무역전쟁 미국이 상호관세를 발표한 직후인 3일(현지시간) 미국 증시는 급락세를 보였다. [AFP=연합뉴스] 미국의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역대 전투에서 전사한 마을 젊은이의 이름이 적힌 기념물을 자주 만난다.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에서 사망한 젊은이는 물론이고 제1, 2차세계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젊은이의 이름도 볼 수 있다. 불과 수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에서 제법 긴 전사자 명단을 보면 초강대국의 역할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초강대국은 동생과 같은 동맹국의 안전과 생계를 책임지는 ‘큰형님’과 같은 부담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유럽에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발발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근본적인 원인 제공은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1920년대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사실 1920년대는 전 세계 경제가 엄청난 호황을 누렸던 시기였다. 그래픽=이윤채 기자 lee.yoonchae@joongang.co.kr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동차·냉장고·라디오 등이 일반인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놀라운 발명품을 제조하면서 큰돈을 번 미국의 투자자는 해외에도 투자를 시작했는데, 전쟁 직후 고급 인력이 풍부했던 독일이 유럽의 생산기지로 선택됐다. 그 결과 독일인은 다른 나라와 싸우지 말고 미국과 같은 외국 자본을 들여와 독일에서 상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하면 전쟁 없는 풍요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지자 미국인은 독일을 비롯한 해외의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투자를 믿고 일했던 독일에서는 하루아침에 대량 실업이 발생했다. 당연히 독일 국민의 결론은 “미국과 같은 외국인을 믿었던 우리가 어리석었다”는 것이었고, 독일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외세를 배격하고 자력으로 경제를 일으키자는 아돌프 히틀러의 주장에 급격히 동조하게 된 것이다. 별 존재감 없는 미약한 극우 정치인이었던 히틀러는 대공황 직후 1930년 선거에서 크게 승리했고, 1932년에는 총리에 임명됐다. 당시 미국이 자신들이 세계의 안보와 경제를 책임지는 리더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 결과 배신감을 느낀 독일인 ━ 미국발 세계무역전쟁 미국이 상호관세를 발표한 직후인 3일(현지시간) 미국 증시는 급락세를 보였다. [AFP=연합뉴스] 미국의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역대 전투에서 전사한 마을 젊은이의 이름이 적힌 기념물을 자주 만난다.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에서 사망한 젊은이는 물론이고 제1, 2차세계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젊은이의 이름도 볼 수 있다. 불과 수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에서 제법 긴 전사자 명단을 보면 초강대국의 역할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초강대국은 동생과 같은 동맹국의 안전과 생계를 책임지는 ‘큰형님’과 같은 부담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유럽에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발발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근본적인 원인 제공은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1920년대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사실 1920년대는 전 세계 경제가 엄청난 호황을 누렸던 시기였다. 그래픽=이윤채 기자 lee.yoonchae@joongang.co.kr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동차·냉장고·라디오 등이 일반인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놀라운 발명품을 제조하면서 큰돈을 번 미국의 투자자는 해외에도 투자를 시작했는데, 전쟁 직후 고급 인력이 풍부했던 독일이 유럽의 생산기지로 선택됐다. 그 결과 독일인은 다른 나라와 싸우지 말고 미국과 같은 외국 자본을 들여와 독일에서 상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하면 전쟁 없는 풍요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지자 미국인은 독일을 비롯한 해외의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투자를 믿고 일했던 독일에서는 하루아침에 대량 실업이 발생했다. 당연히 독일 국민의 결론은 “미국과 같은 외국인을 믿었던 우리가 어리석었다”는 것이었고, 독일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외세를 배격하고 자력으로 경제를 일으키자는 아돌프 히틀러의 주장에 급격히 동조하게 된 것이다. 별 존재감 없는 미약한 극우 정치인이었던 히틀러는 대공황 직후 1930년 선거에서 크게 승리했고, 1932년에는 총리에 임명됐다. 당시 미국이 자신들이 세계의 안보와 경제를 책임지는 리더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 결과 배신감을 느낀 독일인들이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를 따르게 되면서 결국 10년이 지난 193